
기업용 시스템은 수십 년에 걸쳐 현대화됐지만, 변화의 상당수는 표면적인 부분만 바뀌는 데 그쳤다. 새로운 코드베이스, 클라우드 네이티브 스택, 더 세련된 API가 등장했지만, 핵심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새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때마다 그 안에 담기는 의미 체계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다.
각 애플리케이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핵심 개념과 데이터를 정의한다. 위험 수준이나 서비스 이용 자격, 노출도 같은 규칙을 코드 속에 고정시키며, 데이터 구조와 사용하는 용어 및 형식도 서로 다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시스템이 이 방식에 맞추기를 요구한다. 이것이 더 민첩한 방식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은 최신 기술이라는 이름 아래 복잡성을 다시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애플리케이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지능’이라 부를 만한 핵심 로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핵심 로직이 대시보드, 데이터 파이프라인, 배치 작업, 마이크로서비스 곳곳에 숨어있다. 말 그대로 어디에나 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상황이다.
AI가 중심이 되는 지금의 환경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된다.
스스로 설명 가능한 데이터
AI 에이전트가 지능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한다면, 먼저 데이터가 ‘똑똑해져야’ 한다.
이는 데이터가 단순한 테이블과 필드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데이터는 맥락을 담고 있어야 하고, 스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베이스 관리자뿐만 아니라, 데이터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시스템·서비스·에이전트가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여야 한다.
이 지점에서 시맨틱 레이어(semantic Layer, 의미 계층)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객, 계좌, 포트폴리오, 거래, 세금 규칙 같은 핵심 개념을 기업 전체가 함께 쓰는 ‘공통 의미 체계’로 정리하면, 각 애플리케이션에 일일이 해당 개념을 다시 구축할 필요가 없다. 한 번 정의해 두면 모든 시스템이 그대로 참조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데이터는 단순한 값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와 논리, 비즈니스 규칙까지 포함한 ‘진실의 원천’이 된다.
애플리케이션은 그저 이 공통 의미 체계를 활용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의미와 규칙 같은 핵심 로직을 코드에서 떼어내 기계가 읽을 수 있는 계층에 옮기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애플리케이션은 훨씬 단순해지고, 모듈화되며, 필요하면 교체도 쉬워진다. 이때 기업의 각종 시스템은 IT 부서뿐 아니라 비즈니스 조직에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형태가 된다.
기업 환경에 필요한 AI 작동 방식
AI는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할 때마다 비즈니스 로직을 처음부터 다시 학습해야 하는 구조에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언어 모델은 강력하지만, 필요한 맥락이 없으면 쉽게 엉뚱한 답을 만들어낸다. 규칙 기반 엔진은 정확하지만, 의미가 불분명하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지금 기업의 워크플로우, 포털, 코파일럿에 들어가고 있는 AI 에이전트 역시 자신이 다루는 데이터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핵심 의미와 규칙을 데이터에 담는 일은 단순한 데이터 전략이 아니다. AI 전략 그 자체다.
필자가 시맨틱 아키텍처를 다루는 과정에서 확인한 사실도 같다. 비즈니스 지식을 기계가 바로 활용할 수 있는 형식으로 정의해 두면, 그 데이터는 단순히 읽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질의하고 조합할 수 있으며, 다양한 용도로 재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구조화된 데이터는 에이전트들이 별도의 접착 코드나 ETL 파이프라인 없이도 도메인 간에 협력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기계가 소비할 수 있는 프로토콜’의 핵심 개념이다. 시스템과 에이전트가 공통 지식 기반 계층에 맞춰지면, 서로 같은 언어를 쓰듯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에이전트가 성숙해지면 서로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때의 소통은 불안정한 REST API 호출이나 복잡한 페이로드 변환이 아니라, 공통된 의미를 기반으로 이뤄진다. 에이전트는 서로 질문하고,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고, 함께 작업을 조율한다. 다시 말해 비즈니스의 의미 체계가 애플리케이션 코드나 문서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자체에 내재한 구조가 되는 셈이다.
실제 현장에서의 활용
자산관리 업무를 예로 들어 살펴볼 수 있다. 가령 공격적인 위험 성향을 가진 고객 가운데 암호화폐 노출도가 높고, 앞으로 90일 안에 세금이 발생할 수 있는 거래를 앞둔 고객을 찾고자 하는 경우다.
기존 방식이라면 이 작업에 여러 팀이 달라붙어야 한다. 각 팀이 별도의 로직을 만들고, 맞춤형 대시보드를 구성하고, 서로 다른 시스템 간 데이터를 통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계층마다 정의가 조금씩 달라 해석이 반복되고, 기준이 바뀔 때마다 관련 코드를 다시 손봐야 했다.
지능형 데이터 모델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시맨틱 레이어가 이미 위험 성향이 무엇인지, 노출도를 어떤 방식으로 계산하는지, 세금 부과 요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정의해 두기 때문이다. 데이터는 서로 연결돼 있고, 규칙은 투명하며, 관계는 그대로 탐색할 수 있다. AI 에이전트는 개발자나 분석가의 도움 없이도 직접 추론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에이전트는 다른 에이전트와 대화할 수도 있다. 상품 추천을 담당하는 에이전트, 세금 손실 회수 기회를 계산하는 에이전트, 포트폴리오의 불균형을 감지하는 에이전트 등과 자연스럽게 협력할 수 있다. 규칙을 개별 애플리케이션 코드에 고정해 둘 필요 없이 에이전트끼리 자연스럽게 조율할 수 있다.
이 논의가 중요한 이유
오늘날 기업은 단순히 AI를 도입하는 수준을 넘어, AI를 중심으로 조직 전체를 재편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앞으로 기업에는 포트폴리오를 모니터링하는 에이전트, 고객 문의에 응답하는 에이전트, 컴플라이언스 보고서를 검토하는 에이전트가 함께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들이 각자 다른 기준과 로직으로 움직인다면, 기업의 AI 전략은 복잡성에 눌려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모든 에이전트가 공통 시맨틱 레이어를 바탕으로 소통하고, 해당 레이어는 기계가 활용할 수 있는 프로토콜로 뒷받침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기업은 확장성과 명확성을 확보할 수 있고, 개별 에이전트가 만들어내는 지능이 서로 결합되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무엇보다 하나의 문제를 시스템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시 구현하는 반복 작업을 피할 수 있다.
단순한 애플리케이션의 필요성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복잡한 애플리케이션이 아니라, 더 똑똑한 데이터와 단순한 애플리케이션이다. 기업에는 코드 외부에 존재하는 공통 의미 기반이 필요하다. 이는 AI 에이전트와 사람 모두가 의지할 수 있는 기반을 의미한다.
이제는 오히려 ‘둔한’ 애플리케이션을 구축해야 할 때다. 스스로 진실의 원천이 되려 하지 않고, 공통 의미 체계를 그대로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는 비즈니스 로직이 변하더라도 모든 코드를 처음부터 다시 짤 필요가 없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기업에게 실제로 중요한 지식 자산은 애플리케이션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이는 결국 끊임없이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던 비즈니스 지식 속에 묻혀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이 지식을 기계나 AI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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